"전동화 이후의 스포츠카,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 등록 2026.01.26 11:13:46
크게보기


[오토모닝 정영창 기자] ‘엔진’이 사라진 자리에 ‘전기모터’가 들어앉는 시대다. 가솔린을 태우며 폭발적인 굉음을 내지르던 내연기관의 시대에 이어 고요하지만, 강력한 전동화의 파도가 자동차 시장을 덮쳤다. 이 거대한 변화 앞에서 가장 큰 실존적 위기를 겪고 있는 장르는 단연 스포츠카다. 효율성과 정숙함이 미덕인 일반 승용차와 달리, 스포츠카는 비효율적인 소음과 진동, 그리고 기계적인 직결감 그 자체가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다. 

과거 스포츠카의 존재 이유는 명확했다. 더 큰 배기량, 더 높은 회전수, 더 자극적인 배기음. 그러나 전동화 시대에 들어서며 그 공식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다. 배터리와 모터가 성능의 핵심이 된 지금, 스포츠카는 ‘얼마나 빠른가’보다 ‘무엇을 증명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럭셔리 스포츠카 브랜드들은 이 질문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전동화가 이들의 정체성을 지우기보다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로터스 에바이야, 무거울수록 더 가볍게= 전기차는 필연적으로 무거워진다. 창립자 콜린 채프먼의 “경량화가 답이다(Simplify, then add lightness)”라는 철학을 가진 로터스에, 무거운 배터리는 태생적인 적이다. 그러나 로터스는 이러한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정공법을 택했다. 

최고출력 2,000마력이 넘는 로터스의 하이퍼 전기 스포츠카 에바이야(Evija)는 출력으로 무게를 덮지 않았다. 대신 탄소 섬유 모노코크, 극단적인 경량 소재, 불필요한 부품 최소화로 전기차 치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의 경량화를 추구했다. 섀시, 차체 패널, 심지어 전면 서브 프레임까지 차체 전체가 탄소 섬유로 만들어졌다. 덕분에 91kWh 용량의 배터리(743㎏)를 운전석 뒤쪽에 장착하고도 1,894㎏이라는 공차중량을 달성했다. 

로터스의 논리는 여전히 명확하다. 무게를 줄이면, 모든 성능 수치가 동시에 좋아진다. 즉, 모터의 즉각적인 토크를 ‘날것의 가속’이 아닌, 정밀하게 제어된 드라이빙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전기차의 가속은 이미 충분히 빠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에바이야에서 가벼움이 유효한 이유는 단 하나다. 

전동화 시대에도 스포츠카의 본질은 ‘얼마나 빠른가’가 아니라 ‘얼마나 정교하게 반응하는가’이기 때문이다. 차체가 가벼우면 노면 정보가 더 선명하게 올라오고, 반응이 빠르면 운전자는 차와 더 자주 ‘대화’하게 된다. 로터스에 전동화는 타협이 아니라, 오히려 브랜드의 원형을 현대적으로 증명하는 도구다. 로터스 에바이야는 단 130대 한정 생산되고 있다. 


F1에서 시작된 페라리 전동화의 긴 호흡= 페라리는 아직 순수 전기 스포츠카를 내놓지 않았다. 대신 하이브리드를 통해 시간을 벌고 있다. 이 선택은 매우 페라리답다. 페라리에게 스포츠카의 본질은 수치가 아니라 감정의 곡선이기 때문이다. 전동화와 관련해 페라리는 경량화, 성능, 페라리만의 고유한 주행 경험에 중점을 둔 레이싱 헤리티지를 이어가고 있다. F1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는 페라리에서는 오랫동안 레이싱 액티비티와 공도용 차 사이의 의미 있는 기술 이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2013년 페라리 최초의 하이브리드 로드 카는 강력한 라페라리(LaFerrari)의 모습으로 탄생했다. 탄소섬유 차체로 된 이 하이퍼카는 눈길을 사로잡는 오렌지색 고압 케이블과 듀얼 전기 모터 구성으로, 6.3리터 V12 엔진에 163CV의 전기 모터를 결합했다. 2020년에 출시된 SF90 스트라달레는 한 단계 더 진보했다. 

최신 모델인 SF90 XX 스트라달레는 7,900rpm에서 797CV를 발휘하는 4.0리터 트윈터보 V8으로 구동된다. 페라리는 곧 순수 모델 일레트리카를 내놓을 예정이다. 2열 좌석과 사륜구동이 특징인 이 신형 모델은 포뮬러 1에서 시작된 20년 이상의 전동화 연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변화가 아닌 강화, 람보르기니식 전동화 전략= 람보르기니는 언제나 과격하고, 시끄럽고, 거칠었다. 전기차의 매끄러움은 람보르기니의 DNA와 정반대다. 그래서 그들은 하이브리드 슈퍼카 레부엘토(Revuelto)를 통해 V12 엔진을 최대한 오래 살려두는 전략을 택했다. 전동화라는 수식어만 놓고 보면, 이전 세대 아벤타도르의 계보를 잇는 이 모델 역시 ‘변화’의 산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레부엘토의 핵심은 변화가 아니라 강화다. 

전기모터는 엔진을 대체하지 않는다. 대신 V12 엔진의 폭력적인 캐릭터를 더 즉각적으로, 더 과감하게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된다. 정숙함이나 효율을 위한 하이브리드가 아니라, 가속 초반의 반응성과 체감 충격을 증폭시키는 장치다. 

레부엘토의 전동화는 기술적 진보라기보다, 람보르기니식 과장의 연장선에 가깝다. 동시에 순수 전기차 콘셉트인 란자도르(Lanzador)를 통해 미래를 예고했다. 람보르기니의 전동화 핵심은 ‘제어 가능한 광기’다. 1,300마력이 넘는 힘을 쏟아부어 전기차 특유의 밋밋함을 없애고, 여전히 길들이기 힘든 야수와 같은 거친 매력을 소프트웨어 세팅으로 구현해 낼 것이다. 
그란투리스모의 언어로 해석한 마세라티의 전동화= 마세라티는 태생부터 슈퍼카 브랜드라기보다 ‘그란투리스모’의 언어로 정의되어 온 브랜드다. 빠르되 거칠지 않고, 강력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는 주행 감각, 목적지보다 여정 그 자체에 가치를 두는 태도가 마세라티를 설명해 왔다. 이러한 정체성은 전동화 시대에 오히려 설득력을 얻는다. 

전기 파워트레인이 가진 정숙성, 즉각적인 토크, 장거리 주행의 편안함은 본질적으로 GT 개념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마세라티는 전동화 라인업에 ‘폴고레(Folgore)’라는 이름을 붙였다. 번개를 뜻하는 이 단어는 파괴보다는 순간의 아름다움과 우아한 에너지를 연상시킨다. 

그란투리스모 폴고레에서 전기모터는 공격적인 가속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대신 가속 과정의 매끄러움과 흐름을 정제하는 역할을 맡는다. 빠르지만 성급하지 않고, 운전자를 재촉하지 않는 성격은 마세라티가 전동화를 해석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운드의 상실은 마세라티에 가장 큰 도전일 수 있다. 

그들은 ‘진실된 소리의 증폭’을 택했다. 전기모터와 인버터가 만들어내는 고유의 고주파 소음을 엔지니어들이 정밀하게 튜닝하고 증폭시켜, 마치 제트기 엔진과 같은 날카롭고 미래지향적인 ‘디지털 터빈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이는 내연기관의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라, 전기차만이 낼 수 있는 새로운 소리의 미학을 창조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정영창 기자 jyc@automorning.com  
 
정영창 기자 jyc@automorning.com
< 저작권자 © AutoMorning,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PC버전으로 보기

오토모닝 Copyright ⓒ 오토모닝 Auto Morning All rights reserved.